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첸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체첸 공화국]]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산맥 일대에 있는 공화국으로,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의 땅에 사는 약 120만 명 인구의 대부분이 [[체첸인]]이다. 체첸인은 고유의 [[체첸어]]를 쓰고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과 [[다게스탄]]을 통해 전파된 [[수니파]] [[이슬람]]을 믿어 온 민족이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일대에 대한 정복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을 캅카스 전쟁이라고 한다. 격렬한 저항 때문에 거의 반세기나 지난 [[1859년]]에서야 러시아는 이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일시적으로 체첸인들이 독립하여 산악 공화국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소련]]은 [[1921년]]에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였고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어 소련으로 편입되었으며 곧 이어진 [[이오시프 스탈린]]의 [[숙청]]으로 인해 10만여 명에 이르는 체첸 지식인·공산당원들이 처형당하거나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이 캅카스 지역으로 진군할 때 이들에게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1944년]] [[2월]]에 체첸 인구의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50여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관리 소홀, 수많은 이탈자와 [[게릴라]] 투쟁으로 인해 23만여 명의 체첸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편승하여 체첸인들은 1957년에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얻었다. 이슬람을 믿는 체첸인들은 예전부터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갈망해 왔는데 이러한 체첸인들에게 [[1991년]]의 [[소련 붕괴]]를 전후한 상황은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해 10월 체첸인들의 압도적 지지를 통해 체첸의 대통령에 취임한 [[조하르 두다예프]]는 소련 붕괴가 발생하기 직전에 체첸의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신생 러시아에는 체첸 지역의 송유관 시설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연방 붕괴를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체첸의 독립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정부는 1991년 소규모 병력을 체첸으로 급파하였으나 두다예프의 군대가 이를 막아섬에 따라 물러났다. [[1993년]] 러시아는 체첸의 일부를 인구시 공화국으로 떼어내어 신생 러시아 연방의 구성원으로 편입시켰다. 한편 독립한 체첸의 내부 사정은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어갔다. 두다예프 정부는 강력한 비체첸인 차별 정책을 펼쳤는데 이에 따른 차별과 폭력 때문에 비체첸인들은 체첸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러시아 지식인들이 체첸에서 추방됨에 따라 체첸 경제는 곤두박질쳤으며 가혹한 차별 정책에 대한 비체첸인들의 저항도 격해졌다. 결국 두다예프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충돌은 1992년부터 서서히 내전 상태로 치닫기 시작했다. 체첸 내전 기간 동안 러시아는 반군에 무기뿐만 아니라 소수의 병력까지 지원하면서 두다예프의 실각을 꾀했지만 두다예프의 정부군은 [[1994년]] 11월까지 반군의 거듭된 공세를 잘 방어해냈다. 결국 1994년 11월 29일 러시아는 두다예프에게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지만 두다예프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를 거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